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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법상스님의 글이다 내 안에 삶의 나침반이 있고 부처가 있다라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고통과 문제를 마주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을 뽑아보았다.
내 삶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
내 삶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은 내 삶에서 배워야 할 어떤 것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일어나는 일이야 말로 내가 지금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이다. 쉽게 말해 한결같은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어떤 일들이야말로 내가 이번 생에서 풀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삶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내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이나 과도하게 싫어하는 것은 오히려 내가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보여 준다. 좋거나 싫은 것 모두 과도해지면 나를 사로잡아 버린다. 내가 지닌 업의 성향이 드러내 주는 극단적인 경험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삶이다. 그 배움으로써 극단을 내려놓고 중도의 길을 배워 가는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러니 주어진 삶이 마음껏 일어나도록 허용해 주라. 배움과 경험을 회피할 때 삶은 둔화되지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배울 때 삶은 성장한다.
역경을 통해 지혜를 깨닫게 된다.
역경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에 역경이 더욱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 역경은 깨달을 때까지 내 삶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불안, 혼돈, 역경이라는 도전이야말로 우리를 강하게 하고, 깨닫게 하며, 살아 있게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역경조차 나를 돕기 위해 찾아온 눈부신 아름다움이요 감사함이다. 결과적으로 즐거움은 선업을 받는 것이니 좋고, 괴로움은 악업을 녹이는 것이니 좋다. 깊게 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해피앤딩이 삶의 진실이다.
고통에 대한 치유 프로세스
위대한 의사는 바로 내 안에 있다. 고통, 병이 찾아왔다면 자기 내면이 해결하도록 맡겨 두어 보라. 그러면 찾아온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있어 주어야 한다. 병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게 되면 내면의 자연 치유 프로세스가 작동할 수 없다. 그 병이 온전히 내게 도착해 있을 때, 온전히 수용될 때 비로소 내면에서 가장 유효하고도 적절한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참된 치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것을 근원의 일로 돌리고 내게 찾아온 고통을 허용하며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고통을 받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한다.
삶의 주도권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어떤 상황에서 고통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또한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의 고유한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건강해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실제 몸이 건강해지기까지 한다!. 호텔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방 하나를 청소하는 것이 얼마만큼 운동이 되어 건강을 증진시키는지에 대해 교육을 했더니 교육을 받지 않은 분들에 비해 일의 능률이 올랐을 뿐 아니라, 실제로 건강이 월등히 좋아졌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다.
이처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고통스런 일이 될지, 아니면 운동처럼 힘들지만 즐거운 일이 될지 결정된다. 고통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가 외부에 달려 있다고 여기지 마라. 그것은 나의 선택 사항이다.
줄 때, 더 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업보라는 법칙, 즉 균형의 법칙에서 본다면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주는 것이 곧 내가 받게 될 것과 다르지 않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을 돕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 때 내 안에 넉넉함, 풍요, 행복, 사랑, 일체감 등의 지혜와 자비의 파동이 일어나고, 그 파동은 이 우주에 있는 동일한 파동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머지않아 더 많은 풍요와 부, 행복과 기쁨들이 내 삶에 현실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주는 마음을 연습하면, 계속해서 더 줄 수 있는 상황, 즉 부와 풍요가 넘쳐나게 된다. 계속 줄 수 있는 현실이 창조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
외적인 것에 많이 신경쓰고, 관심이 많다는 것은 자존감이 낮다는 의미다. 또한 과도하게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며, 이는 곧 타인에게 휘둘리는 의존적인 삶을 산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는 나를 힘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내가 가진 본연의 힘을 외부로 넘겨준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때만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내면에 힘이 없다. 그 힘을 바깥으로, 타인에게로 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스스로 노예처럼 휘둘리는 존재로 전락한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또 그럴 수도 없다. 타인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을 허용해 주라. 그는 나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뿐이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때 끊임없이 내 밖의 세상으로 인해 상처받게 된다.
경쟁하는 삶, 감동하는 삶
행복이란 마음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이고, 그것은 곧 내면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이 외부의 돈, 명예, 권력, 학벌, 성적 등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 다녀 온 아이에게 "공부 잘 했니?"를 물을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재미있었니? 즐거웠니?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전자의 삶은 머리 중심의 삶이지만, 후자의 삶은 가슴 중심의 삶이다. 생존 경쟁의 삶에서는 끊임없이 머리를 쓰고, 공부를 하고,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 머리에 불을 켜고 이겨야 한다. 머리로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를 끊임없이 계산해야 한다. 그러나 가슴 중심의 삶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오감을 이 세상으로 활짝 열어 다만 가슴으로 느길 뿐이다. 비교나 판단 없이 모든 친구들과, 심지어 대자연의 모든 것들과 하나되어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그를 판단할수록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든 그 판단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어떤 말이나 판단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자기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사람의 삶의 행로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삶의 경험을 통해 그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통해 삶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그 누군가에 대해 내 식대로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할 이유는 없다.
그 사람을 좋거나 나쁘다고 하는 판단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다. 중요한 점은 상대방을 판단하고, 규정짓고, 분별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사람의 본질에서 더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런 판단이나 분별도 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한 발자국 더 존재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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