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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책 에크하르트 톨레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중  와 닿는 구절들을 남겨본다. 그는 자기의 머릿속 목소리(에고)가 실은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에고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것이 우리가 다시 삶으로 떠오르는 방법일게다.  

 

 

 

자기의 '머릿속 목소리'가 실은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이다. 

새로운 의식의 핵심은 생각의 초월에 있다. 생각보다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생각보다도 무한히 광대한 차원이 자기 자신 내부에 있음을 깨닫는 새로운 능력에 있다. 그때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느낌을, 지금까지 자기 자신으로 여겼던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을 찾지 않는다. 자기의 '머릿속 목소리'가 실은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생각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생각 이전의 그 알아차림, 생각이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자신이다. 감정과 감각 지각이 일어나는 공간이. 

 

 

내적으로 항복할 때, 저항하지 않을 때,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비극적인 상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것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항복한다. 억울해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는 사람도 있으며,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사랑이 더 커지는 사람도 있다. 항복은 있는 그대로를 내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삶을 향해 자신을 여는 것이다. 저항하면 내면이 움츠러들고 에고의 껍질이 단단해 진다. 당신은 닫힌다. '부정적인 상태'라고도 부를 수 있는 내적인 저항 상태에서는 어떤 행동을 취해도 더 많은 외부적 저항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때 우주는 당신 편에 서지 않는다. 삶은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셔터가 내려져 있으면 햇빛은 들어올 수 없다. 

 

내적으로 항복할 때, 저항하지 않을 때,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그때 만약 행동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다면, 당신의 행동은 전체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내적으로 열린 상태일 때 당신과 하나가 되는 창조적인 지성과 조건 지어지지 않은 의식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것이다.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본래의 당신이다.

'나'라는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는 그 반대 생각인 '남'이 필요하다. 개념적 '나'는 개념적 '남'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남'은 내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할 때 가장 확실한 '남'이 된다. 에고가 지배하는 이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의 한쪽 끝에는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불평하는 에고의 강박적인 습관이 놓여 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 나 자신이 더 크고 더 우월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분개하기를 좋아한다. 즉 상황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늘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표현된다. '이 일은 일어나서는 안 돼. 나는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어' 

 

 

수프가 식었기 때문에 종업원에게 따뜻하게 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에고가 아니다. 사실만을 말하기 때문이며, 사실은 언제나 중립적이다. "어떻게 나한테 다 식어빠진 수프를 갖다줄 수 있지?" 이것은 불만이다. 여기에는 '나한테'라는 의식이 있고, 식은 수프에 개인적인 모욕을 느껴 소란을 피우는 '나', 누군가가 잘못되었다고 만들기를 즐기는 '나'가 있다. 이 불만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기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워하는 바로 그 순간 머릿속 목소리를 잡아챌 수 있는지, 즉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 에고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그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본래의 당신이다. 배경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전면에는 그 목소리, 즉 생각하는 자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에고로부터 해방되고,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라, 단지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에고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다. 오래된 마음의 방식이나 생각의 습관은 당분간은 여전히 살아남아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배후에는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이 가진 추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아차릴 때마다 매번 힘이 약해질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인간의 행동은 진리를 반영하거나 환상을 반영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 진리는 당신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 당신이 진리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면 매번 속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로 전하려고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진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존재인 그 생명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을 '내면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진아), 즉 내면에 거하는 신이라 부른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 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 특별히 기적적인 성취가 아니다 - 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율법, 계명, 계율, 규정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과 단절된 사람들, 자기 내면의 진리와 분리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것들은 에고의 최악의 폭주를 막는 역할을 하겠지만, 종종 그것에조차 실패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언어로는 이것 이상으로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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